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에는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흔적을 기리기 위해 2006년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곳은 그의 독립운동 행적과 정신을 전시하며, 후대의 교육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김구 선생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는 자료와 당시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우물도 보존되어 있다.
쇠실마을은 서재필, 나철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보성 지역의 역사적 자부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 쇠실마을은 어떤 곳인가?
쇠실마을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준 숨겨진 보금자리 같다. 넓은 농경지가 끝나는 지점에 약 10미터 높이의 흙둔덕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다. 과거에는 산길을 따라야만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현재는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터널이 개설되어 있고 마을로 향하는 길은 경사로로 이어져 있다. 이곳에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은거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주변에서는 맑은 샘물이 솟아올라 식수를 해결할 수 있다.
마을 뒤쪽으로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으며, 이는 호남정맥과 연결된다. 현재도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길이지만, 과거에는 이곳이 추격을 피할 수 있는 도피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쇠실마을은 높은 지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외부 침입 시 방어에 유리하다. 또한 위급할 경우 산으로 도망갈 수 있는 지형적 장점도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 같은 공간이다.
이처럼 은거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쇠실마을은 과거 특정 인물이나 세력이 피신했던 장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는 간선도로가 뚫려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역사적 숨결이 깃든 마을로서 주목받고 있다.
- 김구 선생이 1898년 보성군 쇠실마을로 은거하게 된 배경은?
1898년 봄, 당시 23세였던 김구 선생은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한 사건으로 조선 관헌과 일본 제국주의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은 그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된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고종의 사형집행 정지령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계속된 감금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탈옥을 결심한다. 탈옥 후, 삼남 지방으로 몸을 숨기던 김구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에 위치한 김광언의 집에서 약 40여 일을 은거하며 피신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동국역대라는 역사서를 중심으로 민족의 현실과 시대적 과제를 논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이곳 쇠실마을에서 청년 김구선생은 매일 같이 독서와 주변의 험준한 산길을 걸으면서 민족의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 김구 선생이 쇠실마을을 떠난 뒤 주요 행적은?
쇠실마을을 떠난 김구는 계속해서 삼남 지방을 돌며 일본과의 투쟁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했다. 이후 충남 마곡사로 이동해 한동안 은거 생활을 이어갔고,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무장투쟁을 병행하며 조국 독립을 위한 조직적 투쟁을 이끌었으며, 일제 강점기 내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 1946년 김구선생이 두 번째 쇠실마을을 방문하게 된 배경은?
광복 이후,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는 경남과 전남 지역을 순회하며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 통합을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쇠실마을을 방문하게 된 김구는 과거 은신처였던 김광언의 집을 찾아 옛 기억을 떠올리며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48년 전 자신을 숨겨주고 함께 민족의 앞날을 논했던 김광언에 대한 애틋함을 감추지 못하며, 마루에 앉아 과거를 회상했다. 이 방문은 김구와 쇠실마을 주민들에게 역사적 감동을 선사했으며, 선생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46년 쇠실마을 방문 이후의 김구선생의 행적은?
쇠실마을 방문 후, 김구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을 추진하며 민족 통합의 길을 모색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김일성과의 회담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 했으나, 냉전의 여파 속에서 남북의 이념적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1949년 6월, 김구는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민족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비전을 완수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김구선생이 총탄에 쓰려졌다는 소식에 보성군민은 깊은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훗날 김구선생이 남긴 뜻을 기리고 그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선생이 은신했던 김광언의 집을 중심으로 추모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지은 것이다.
- 오늘날 김구선생이 한국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21세기 한국 사회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내적 갈등 속에서 통합과 화합의 리더십을 절실히 요구받고 있다. 김구 선생은 “내가 원하는 나라는 강대국이 아닌 문화 강국”이라고 언급하며,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강국을 넘어선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국가를 지향했다. 이러한 비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도전 과제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희생정신과 민족 통합의 노력이 현재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쇠실마을에 세워진 김구 선생 기념관은 단순한 역사적 유적지가 아니라,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백범 김구의 흔적을 되새기며, 그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