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가지 너머로 펼쳐진 벌교의 물길과 갯벌. 낙안 상송에서 출발한 물은 들판을 지나 바다로 스며들며 천년의 시간을 이어간다. 사진=문금주
낙안면 상송에서 시작된 물길이 들판을 지나 벌교 바닷가와 갯벌로 이어진다. 수만 년의 시간을 품은 천년 물줄기. 사진=문금주
낙안천의 첫 물길, 상송저수지. 금전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자연과 사람이 함께 숨 쉬는 하천 풍경을 만든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들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는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금전산에서 내려오는 물, 금전산과 오봉산 사이의 물줄기, 제석산 자락과 징광산에서 흘러드는 물이다. 이 가운데 금전산에서 시작해 상송저수지–살푸정–원등마을–벌교 홍교–진석포구를 거쳐 바다로 향하는 물길은 옛 낙안군의 천년을 이어온 대표적인 물줄기로 꼽힌다.

물길의 시작, 상송저수지
상송저수지는 금전산에서 내려온 물이 처음 모이는 곳이다. 이곳을 출발한 물은 곧바로 하송마을로 흐르며, 일부 구간은 시멘트 제방으로 정비되어 있고 일부는 자연하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인공과 자연이 공존하는 이 하천은 물고기와 곤충 등 생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편안한 풍경을 선사한다.

살푸정(사포정), 천년 물길의 경계
하송마을을 지난 물줄기는 옥산마을 인근의 살푸정(사포정)에 이른다. 현재는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지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며 쪽배가 오가던 항구였다. 경지정리로 물길이 바뀌면서 바다와 단절됐고, 살푸정은 옛 항구의 흔적으로 남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바닷물이 닿았던 지점으로, 천년 물줄기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다.

들판을 흐르는 생태하천
살푸정을 지난 물은 실개천과 넓은 수로를 반복하며 원등마을을 통과한다. 수로 주변에는 다양한 식물 군락이 형성돼 생태하천의 모습을 보이지만, 생활쓰레기와 불법 소각 흔적도 남아 있어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드러난다.

강과 바다의 경계, 벌교
약 7km를 흐른 물줄기는 벌교 홍교다리 인근에서부터 강과 바다의 성격을 함께 띠기 시작한다. 하천 폭은 급격히 넓어지고, 봉림교와 보물 제304호 벌교 홍교, 최근 개통된 인도교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구간은 과거 주민들이 수변 휴식공간 조성을 꿈꾸던 장소이기도 하다.

갯벌과 갈대의 시작, 벌교 바닷가
벌교 철다리와 벌교대교 인근부터는 본격적인 갯벌과 바다가 펼쳐진다. 장좌리 마을 일대에는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며, 현재는 걷기 전용 보드워크와 갯벌체험장 조성이 진행 중이다. 벌교의 갯벌과 갈대는 ‘보고, 걷고, 체험하는’ 생태관광 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천년 물길이 남긴 메시지
낙안면 상송에서 시작해 들판을 지나 벌교 바닷가로 흘러든 이 물줄기는 민물 약 7km, 바닷길 약 7km를 거쳐 수만 년 역사의 갯벌에서 머문다. 과거 농업을 위한 보조 수단이었던 물길은 이제 “물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는 시대적 가치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 천년의 물길을 살리는 일은 낙안과 벌교 어느 한쪽만의 과제가 아닌, 공동의 지역 과제로 남아 있다.

낙안군과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외서면, 보성군 벌교읍, 고흥군 일부 지역은 과거 낙안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운동 무력화와 행정 재편을 이유로 낙안군을 폐지하고 인근 지역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그럼에도 벌교천과 낙안의 물줄기는 옛 낙안군의 역사와 삶을 오늘까지 묵묵히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