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산 남단, 와우형국(臥牛形局)에 자리한 장양마을. 뒤로는 투구봉과 칼봉이 우뚝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장군바위와 천마산으로 이어진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 선조 때 해남 출신의 참의 윤선도 공이 이곳의 터를 정하며 “장하고 빛낼 인물과 거부가 날 자리”라 하여 ‘장양(長陽)’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1590년경 신라 태자 태사와 관련된 마을 형성 설화도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사진=문금주
남녘의 햇살이 가장 먼저 내려앉는다 하여 ‘양지개’라 불렸던 장양리. 이름은 따스하지만, 그 정착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 전, 이곳 사람들은 마르지 않는 샘을 찾아 먼 길을 오가야 했다. 어머니들이 길어 나르던 우물물에는 척박한 땅을 일구어낸 선대들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590년경 신라 태자 태사와 관련된 마을 형성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장. 마을이 형성되면서 약 100여 가구가 식수와 빨래터로 함께 사용하던 공동 우물은, 오늘날 지하수와 상수도가 공급되면서 그 기능은 줄었지만, 여전히 마을의 역사와 정서를 간직한 채 보존되고 있는 소중한 생활유산이다. 사진=문금주
마을 어귀에서 중도방죽을 굽어보는 늙은 팽나무는 이 땅의 시간을 기억하는 산증인이다. 일제강점기, 강제로 동원된 민초들이 제 나라 땅 위에서 방죽을 쌓아야 했던 서러운 역사를 묵묵히 지켜봤다. 돌 하나하나를 옮기며 갯벌을 논으로 바꾸던 거친 손마디, 바닷바람 속에서 흘렸던 땀과 곡소리가 팽나무의 깊은 주름처럼 이 땅에 새겨져 있다.
전라남도 보호수 제15-14-2-18호 팽나무. 1982년 12월 3일 지정되었으며, 수령 약 370년, 수고 15m, 나무둘레 3.5m에 이르는 노거수로 보성군 벌교읍 장양리 산646번지(장양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매년 음력 대보름이면 당신제를 올리던 신목(神木)으로, 오랜 세월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왔다. 일제강점기, 방죽을 쌓으며 갯벌을 논으로 바꾸던 민초들의 고단한 삶 또한 묵묵히 지켜본 나무. 깊게 패인 나이테와 주름은 돌 하나하나를 옮기던 이웃들의 거친 손마디를 닮아, 이 땅의 역사와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사진=문금주
방죽 너머로 펼쳐진 간척지는 오늘날 풍요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수탈의 아픔이 서려 있다. 배고픈 시절, 마을을 지켜낸 것은 곳곳에 뿌리내린 동백나무였다.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도 붉은 꽃을 피워낸 동백은,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자식들을 키워낸 장양리 사람들의 강인한 삶과 닮아 있다.
방죽 너머로 펼쳐진 넓은 간척지. 오늘날에는 황금빛 들녘으로 풍요를 상징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탈과 강제 동원의 아픔이 켜켜이 스며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사진=문금주
지금의 장양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팽나무 그늘 아래 잠시 숨을 고르고, 동백꽃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 땅이 품어온 지난한 시간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보성군 보호수 제15-14-2-30호 동백나무. 2005년 5월 2일 지정되었으며, 수령 약 375년, 수고 7m, 나무둘레 1.8m에 이르는 노거수로 보성군 벌교읍 장양리 610번지(장양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1630년 4월 식재된 것으로 전해진다. 붉은 동백꽃이 피어나는 이 마을은 이제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평화롭고 따스한 볕이 드는 고장으로 자리 잡았다. 팽나무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르고, 동백꽃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 땅의 숨결과 시간이 조용히 전해진다. 사진=문금주
양지개는 단지 볕이 잘 드는 마을이 아니다. 눈물이 고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오늘의 따스함으로 이어진 삶의 자리다.
중도방죽의 바람은 여전히 분다. 그러나 이제 그 바람은 아픔만이 아니라, 기억과 회복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