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수군재건로(보성 구간)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 조성된 길이다. 벌교역에서 출발해 조양창터, 박곡 양산원의 집, 열선루, 백사정, 군영구미까지 이어지며, 장군의 결연한 10일을 체험할 수 있다. 사진=문희옥
보성읍성 안에 있었던 열선루는 이순신 장군이 ‘금신전선상유십이’ 장계를 작성한 상징적 장소다. 일제강점기에 소실됐다가 2025년 10월 완공을 앞두고 군민의 자긍심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사진=보성군
방진관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로 재임하던 시기의 삶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역사관이다. 방진은 이순신의 무예와 인격 수양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곳은 장군과 보성의 인연을 보여주는 대표적 기념관이다. 사진=문희옥
조선 수군의 활 전술 상상도.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 맞서 조선군은 활의 빠른 발사 속도와 긴 사정거리를 무기로 삼아 바다에서 맞섰다. 판옥선 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은 왜선의 기동을 묶고, 조총보다 우월한 연속 사격으로 전황을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림=생성형 인공지능 상상도
1597년 8월 18일 아침, 군영구미 앞에 들어온 향선(민간어선) 10척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그림. 그림=생성형 인공지능 상상도

패전의 잿더미 속, 이순신은 보성에서 다시 일어섰다. 단 열흘 동안의 결연한 행보가 무너진 수군을 되살리고, 훗날 명량대첩의 기적을 향한 불씨가 되었다. 《난중일기》 속에서 이순신의 수군 재건 ‘보성 10일’을 따라가며 그 발자취를 정리한다.

  1. 이동 경로 — 벌교읍에서 회령포까지

1597년 음력 8월 9일, 이순신은 낙안에서 벌교로 들어와 보성 땅을 밟았다. 이어 조양창(군량창고), 박실마을(양산원의 집), 보성 읍성(열선루), 백사정, 군영구미를 거쳐 18일 아침 장흥 회령포로 향했다. 오늘날 보성군은 이 행적을 따라 ‘이순신 수군재건로 보성 구간’을 조성해 장군이 남긴 결연한 발걸음을 기리고 있다.

2. 보성에서 만난 사람들 — 군사와 의병의 집결

보성에서 이순신은 뜻깊은 인물들을 만났다.

  • 최대성: 옥포해전의 전공자이자 정유재란 의병장으로, 이순신과 다시 힘을 모았다.

  • 송희립: 장군의 측근 군관으로, 명량과 노량까지 함께한 충직한 참모였다.

  • 안위·소계남: 칠천량 패전 뒤 동요했으나, 이순신의 질책과 설득 속에 명량대첩에서 각각 전선을 지켜냈다.

  • 이몽구: 우후로서 군율을 어겼다가 장 80대의 중형을 받았으나, 이를 통해 질서 확립의 본보기가 되었다.

  • 김명립·마하수: 《난중일기》에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군영구미에서 향선 10척을 동원해 장군이 바다로 나아가도록 만든 숨은 공신들이었다.

3. 주요 행적 — 수군 재건의 씨앗

보성에서 머문 10일 동안 이순신은 조양창에서 군량을 확보하고, 지역 의병장들과 재회했으며, 열선루에서 임금의 유시를 받들고 장계를 구상했다. 또한 군율을 바로 세우고 활쟁이들과 전술을 논의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이후 최초로 다시 바다로 나아간 출발점이 바로 보성이었다는 점이다.

4. 보성에서 이순신을 기억하는 장소

  • 방진관: 장군의 장인 방진을 기리는 곳으로, 현재는 체험관으로 복원돼 있다. 이순신과 보성의 인연을 보여주는 대표적 기념관이다.

  • 열선루: 보성 읍성 안에 있었던 누각으로, 이순신이 ‘12척 장계’를 구상했던 상징적 장소다. 현재 신흥동산에 세워져 있으며, 오는 10월 완공과 함께 통합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 군영구미: 회천면 군학마을 해안가로, 이순신이 향선(민간어선)을 얻어 출항을 준비한 곳이다. 지금은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5. 당시 이순신의 주요 관심사

보성에서 장군의 마음은 크게 네 가지로 모였다.

  • 배설로부터 12척 인수 — 조선 수군 재출범의 조건

  • 군량 확보 — 조양창 곡식과 장흥 군량의 철저한 관리

  • 군기 확립 — 무질서를 범한 관리와 장수들을 엄벌

  • 일본 동태 파악 — 남원성 패전 소식을 접하며 내륙 방어 붕괴 속 해상 방어의 절박함 절감

6. 이순신이 보성을 떠난 이후

보성을 떠난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판옥선 12척을 인수하며 수군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

같은 시기 보성에서는 죽천 박광전, 최대성, 전방삭 등 의병장들이 본격적으로 봉기해 지역 방어와 병참 지원을 담당했다.

  • 박광전: 병중에도 의병장으로 나서 천여 명의 군민을 이끌었다.

  • 최대성: 군관 출신으로 의병장이 되어 육지와 바다를 넘나들며 병참을 지켰다.

  • 전방삭: 고흥과 보성 일대에서 해상·육상 전투를 주도하며 왜군을 견제했다.

보성에서 확보한 군량, 민심, 의병의 힘은 훗날 대첩으로 이어졌다. 1597년 9월 명량해전에서 판옥선 12척으로 일본 백여 척을 무찌르며 기적 같은 부활을 알렸다. 이어 절이도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는 장군이 장렬히 전사하기 전까지 조선 수군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켜냈다.

끝자락에서

보성에서의 10일은 짧았지만, 조선 수군 재건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군량과 군기, 의병과 민심, 장수와 주민이 하나로 모였던 그 순간, 이순신은 다시 칼을 쥘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은 명량의 기적과 최후의 노량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