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갑신정변의 경험, 신념을 바꾸다
1884년, 불과 스무 살의 청년 서재필은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군사행동을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뜻을 달리하는 고위 관료들을 잇따라 살해했습니다. 또한 개화파가 구상한 새로운 정부에서 병조참판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변은 사흘 만에 무너졌고,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어린 아들과 아내까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충격은 서재필의 삶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나라를 바꾸려 했던 길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서재필은 무력보다는 언론과 교육, 시민 계몽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길을 택합니다. 갑신정변의 경험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신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활동, 그리고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가문에 덮친 비극, 사상적 전환을 낳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단지 정치적 좌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재필의 가문 전체를 참혹하게 덮쳤습니다. 정변 이후 가족들은 연좌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차례로 희생되었습니다. 양아버지는 파양을 했지만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으며, 생부는 자결했습니다. 형제들 또한 옥사하거나 처형되었고, 친모와 서모, 이복동생들까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혼한 누이들만이 가까스로 화를 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폐허 위에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민중의 지지와 참여 없는 개혁은 사상누각이며, 권력의 칼날은 언제나 가장 약한 이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참혹한 경험은 서재필로 하여금 무력 혁명 대신 언론·교육·시민 계몽의 길을 선택하게 만든 근본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의학의 길을 택한 이유와 의미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그는 정치학이나 외교학이 아닌 의학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길이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학 공부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방법은 훗날 그의 언론 활동과 계몽운동의 기초가 되었으며, 의사로서 확보한 사회적 신뢰는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 독립협회에서의 열정과 강제 추방
10년이 지난 1896년, 개화정권의 초청을 받아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권과 언론의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과 함께 개혁을 주장했으나, 점차 권력층과 충돌하게 됩니다. 결국 정부는 그를 미국으로 강제 추방했고, 지도자를 잃은 독립협회는 곧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추방은 독립협회 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킨 직접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 일본을 배척한 독립운동
갑신정변 당시 일본의 도움을 받았던 서재필은 망명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일본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폭력성과 조국의 현실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영문 장편소설 『한수의 여행』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에는 백악관 인근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날 대회에는 미주 한인 100여 명과 저명한 미국인들이 참석했으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군사지원을 촉구하는 역사적 자리였습니다.
- 궁핍했던 말년의 배경
의사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는 평생을 독립운동과 계몽 활동에 바쳤습니다. 재산을 쌓는 대신 언론과 협회, 강연 활동에 힘을 쏟았기에 노년에는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잠시 미군정의 고문으로 초청되어 활동했으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결국 1951년 필라델피아에서 가난하게 생을 마쳤으며, 장례조차 교포 사회의 도움으로 치러질 정도였습니다.
- 서재필의 한계와 의의
한계
- 갑신정변은 일본 의존적이었으며, 민중 기반이 약해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 독립협회 활동 중 권력층과의 충돌을 조율하지 못해 강제 추방과 협회 해산을 초래했다.
- 미군정기에는 80세가 넘어 실질적 정치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의의
- 한국 최초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서 근대적 합리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 언론 자유, 민권, 의회주의의 씨앗을 심었다.
- 한인자유대회 등을 열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 권력보다 원칙을 택하며,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라는 가치를 평생 실천했다.
맺음말
서재필의 삶은 열정과 좌절, 시련과 극복, 공과 과가 얽힌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정치적 권좌에 오르지 못했고, 가난 속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심은 민주주의의 씨앗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양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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