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산길을 따라 찾은 역사 – 선거이 장군 묘소
깊은 산길을 따라 오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장소를 만나게 된다. 전남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에 자리한 선거이(宣居怡, 1545~1598) 장군 묘소다. 이곳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한 장군의 위용과 시대적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적 장소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낯설다. 임진왜란 당시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릴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랫동안 역사적 평가와 대우에서 소외돼 왔다.
두 개의 봉분, 두 개의 시대
선거이 장군의 묘소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봉분이 두 개로, 위아래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장군을 기리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시기에 두 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묘소를 둘러보면 각기 다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비석과 무인석(武人石, 무장을 한 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통해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장군을 기억하고 기리려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50년 전과 36년 전 무인석 – 시대를 반영한 조각의 차이
묘소를 지키는 무인석도 흥미로운 요소다. 약 15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인석 2점과 36년 전에 세워진 무인석 2점이 함께 서 있다. 특히, 후대에 세워진 무인석은 장군의 위엄을 한층 더 강조한 모습이다. 단순히 앞면만 조각된 것이 아니라, 뒷면까지 정교하게 조각돼 있으며, 갑옷과 무릎 아래까지 촘촘히 감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그 위용은 장군의 용맹과 업적을 후대에 더욱 강하게 남기고자 한 의도를 엿보게 한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장군을 기리는 방식이 달라진 점은 역사적 기억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초혼장(招魂葬)의 의미 – 영혼을 모시다
이곳은 초혼장(招魂葬), 즉 시신이 없는 무덤이다. 선거이 장군은 문중이 작성한 ‘병사공사적’에 따르면, 1598년 울산성 전투에서 적 70여 명을 베며 분투했으나 결국 전사했고,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고향인 보성에서 초혼제를 지내며 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묘소를 조성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묘소의 조각상과 구조에는 단순한 무덤 이상의 정성과 위엄이 깃들어 있다. 이는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장군의 기개와 정신을 후대에 전하려는 의지가 담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잊힌 영웅, 다시 조명해야 할 때
임진왜란이 발발한 첫해, 선거이 장군은 전라도병마절도사(약칭 전라병사)로서 활약했고, 그 뒤로도 병사 또는 수사로 충청, 황해, 경상에서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 그리고 사후인 숙종때 그의 공적을 기려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그러나, 그는 선무공신 1등급, 2등급, 3등급에 포함되지 못하고 1605년에야 선무원종공신 1등급으로 봉해지는 데 그쳤다. 또한,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은 선거이 장군을 24차례나 언급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지만, 선거이 장군은 기록이나 유품을 남기지 않아 후대에 더욱 잊혔다.
보성읍, 선거이 장군 기념관 건립 추진
보성군은 이순신 장군과 그 부하 장수들의 행적을 기리고 관련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선거이 장군은 그의 고향에서도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현재 보성읍이 선거이 장군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이는 단순히 선거이 장군 개인에 대한 예우를 넘어, 보성군민들의 역사적 자부심을 되찾는 길이기도 하다.
산길을 따라 찾은 역사 – 선거이 장군 묘소를 기억하며
묘소를 찾는 길은 쉽지 않다. 마을 주민의 설명을 들으며 가파른 산길을 따라 어렵게 도착한 곳이다. 하지만 묘소를 직접 마주한 순간, 그 길의 험난함이 오히려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시대와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과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무인석의 변화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인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단순히 한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정신과 용맹,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기억의 방식을 함께 마주하는 것이다. 묘소를 바라보며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묘소를 둘러보면, 마음속에서 장군의 기개가 느껴진다. 어쩌면, 이곳을 찾는 이들은 당대 사람들이 선거이 장군에게 느꼈던 존경과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 받을 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보성군민들이 앞장서서 그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기념관 건립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적 자부심을 되찾고, 잊힌 영웅을 다시금 기억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