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장군 최대성 묘소 앞의 무인석으로 장군의 우국 충절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사진=문희옥
기경관내 명기 : 이장 작업중 나온 그릇들로 진품들로 추정된다는 전문가의 평가가 있다. 사진=문희옥
기경관내의 출전도 : 의병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는 최대성장군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문희옥
기경관내의 해상도 : 지휘하는 장군은 이순신이며 최대성 장군은 그 휘하에 군관으로 참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문희옥
기경관내의 육전도: 의병장으로서 안치 등에서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진=문희옥

전남 보성의 들판 끝자락, 충절사에 들어서면 ‘모의장군 최대성(募義將軍 崔大晟)’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낯선 이름 속에는 전란의 불꽃처럼 살다 간 한 의병장의 충절과, 그것을 지켜낸 사람들의 400년에 걸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 충절사는 언제, 어떤 경로로 세워졌나?

최대성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절사(忠節祠)’는 1997년 전남 보성군 득량면에 세워졌다. 그 시작은 1990년대 초, 전남도민과 지역 문중, 지방자치단체의 뜻이 모이면서부터였다.
1992년 기공에 들어간 충절사는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충의를 기억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장군이 목숨을 바친 지 400년 만에야, 세상은 그를 기리는 기념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 장군을 기리는 시제가 열린다. 2025년 시제는 11월 23일에 열릴 예정이며, 이는 그의 충절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2. 최대성 장군은 누구인가?

최대성은 1585년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곧장 의병을 모아 이순신 장군 휘하에 합류하여 옥포·합포·당항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순신은 그의 이름을 《난중일기》와 장계에 직접 적었고, 그는 ‘한후장(捍後將)’으로서 후방을 지키며 전선을 떠받쳤다.

그러나 전투에서 입은 상처와 부친상으로 물러난 사이, 전쟁은 재발했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는 고향 보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아들 언립·후립, 아우 대민, 종제 대영, 심지어 가노(家奴) 두리동과 갑술까지 함께 싸운 전투는 20여 차례에 달했고, 왜군 100여 급을 베었지만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1597년 6월 8일, 보성 안치 전투에서 최대성은 관군의 지원 없이 적을 추격하다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잊혔다. 『선조실록』에는 오히려 그를 “전장을 떠난 자”로 기록했고, 그는 이름 없는 외로운 혼으로 남게 됐다.

그 후 유림과 후손들의 100년 간 상소와 청원이 이어졌고, 마침내 1752년(영조 28년), 조정은 그의 공을 인정해 정려를 내리고 관직을 추서했다. 그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지 154년 만의 복권이었다.

3. 최대성 장군 관련 유적지로 찾아가 볼 만한 곳은?

장군의 마지막 길을 되짚을 수 있는 장소는 세 곳이다.

보성군 득량면 군머리: ‘모의장군 순절지’라 불리는 전투 현장으로, 1995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겸백면 사곡리 묘역: 1997년 정식으로 이장된 장군의 무덤은 비석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후손들이 400년간 그의 충절을 지켜온 상징이기도 하다.

득량면 충절사와 기경관(起敬館): 전란 속에서의 분투와 그 생생한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 공간이다.

4. 기경관에 있는 유품들 – 유물 너머의 이야기

기경관은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다. 최대성 장군과 그를 따랐던 이들의 삶과 죽음이 응축된 공간이다.

의례용 그릇인 명기, 화살촉, 창, 투구, 전란의 격동을 담은 그림 등 50여 점의 유물과 110여 점의 문서가 이곳과 호남진흥원에 보존돼 있다. 1980년대 묘를 이장하면서 출토된 유물 중 상당수는 진품으로 확인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함께 전사한 가노 두리동과 갑술의 흔적이다. 이들은 후손도 없지만, 최씨 문중은 이들을 가족처럼 모시며 추모하고 있다. “종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는 일.” 이 한마디가 이 전시관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준다.

기경관의 벽에는 경주 최씨 문중 화가가 그린 세 폭의 회화가 걸려 있다. 출전도·해상도·육전도로 이어지는 이 그림은 최대성의 삶을 서사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그의 일대기를 설명하는 시각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의 이름은 긴 세월을 돌아왔다.
처음엔 전장을 떠난 자로, 그 다음엔 이름 없는 무덤의 주인으로, 그리고 지금은 ‘모의장군 최대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는 일은 단지 한 사람을 기리는 것이 아니다. 의병과 백성, 함께 싸운 모든 이들의 충절을 되새기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 길을 따라 걷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