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음악으로 민족의 혼을 노래한 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한국 창작음악의 선구자 채동선 — 그의 삶과 음악, 그리고 그가 남긴 조용한 선율의 울림을 따라가 봅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음악의 길을 걸은 사람
채동선(蔡東善, 1901~1953)은 서양 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펼친 한국 근대 음악사의 선구자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서 퇴학당한 뒤 일본, 독일로 유학을 떠나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특히 독일 베를린 슈테른 음악원에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 기틀을 다졌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 활약했다. 그러나 1940년대 일제의 전쟁 동원과 친일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서울 수유리로 은거, 국악 채보와 민요 편곡 작업에 몰두했다. 해방 이후에는 민족음악의 현대화를 위해 ‘고려음악협회’를 창립하고 교성곡(칸타타: 노래와 오케스트라가 결합된 민족서사시) 한강, 조국 등을 작곡하며 민족적 정서를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6·25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생계를 위해 막노동과 담배 판매까지 감내했으나, 끝까지 음악을 놓지 않았다. 1953년 급성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한국 음악사에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서양 형식 속에 한국의 심성을 담아내다
채동선의 음악 세계는 서양 고전음악의 기법 위에 한국적인 정서와 민속성을 덧입힌 독특한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 최초의 현악 4중주단인 ‘채동선 현악4중주단’을 창단하고, 연주와 작곡 활동을 병행하며 서양 음악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대표 가곡들인 향수, 고향, 내 마음은, 바다 등은 서양식 성악 구조 속에서도 한국인의 정서를 섬세하게 담아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예술가로서의 신념을 지키고자 모든 외부 활동을 중단한 채 전통 민요와 국악 채보에 몰두했다. 이 작업은 단순한 수집을 넘어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예술적 성취로 이어졌다.
광복 후에는 민족적 비극과 희망을 대서사시로 풀어낸 교성곡 한강과 조국을 작곡하며, 민족음악운동의 주도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전통과 현대, 서양과 한국을 조화롭게 엮어낸 그의 음악은 한국 창작음악의 새 지평을 여는 기념비적 이정표가 되었다.
음악으로 민족의 아픔을 어루만지다
채동선의 음악은 단순한 예술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의 곡에는 식민과 전쟁, 피란과 절망이라는 시대적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슬픔에서 끝나지 않고, 공동체를 향한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그는 한국적인 창작음악의 ‘길을 만든 사람’이다. 판소리와 민요 같은 전통 요소를 서양 음악 구조 안에 녹여냄으로써 단순한 계승이 아닌 창조적 재해석을 실현했다. 이 같은 시도는 한국 음악이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채동선의 생애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음악가로서의 신념을 지킨 그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물음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채동선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 벌교
채동선의 예술혼은 그의 고향,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벌교에는 채동선의 생가 터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의 음악적 뿌리를 더듬어보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가장 먼저 찾을 만한 곳은 채동선 기념비다. 원래 그의 생가 근처 동산에 세워졌던 이 기념비는 2007년 음악당 개관과 함께 음악당 앞마당으로 이전되었다. 채동선 음악당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공연과 전시가 열리는 지역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며, 지역 예술인들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벌교의 넓은 들판과 한적한 길을 거닐다 보면 그의 가곡 고향, 향수 속 정경이 문득 떠오른다. 음악당과 그 인근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 축제나 국악 공연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한편, 채동선이 일제 말 은둔하며 민족음악 채보 작업을 벌였던 서울 수유리, 그리고 그가 교수로 재직했던 연세대학교 캠퍼스 역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의미 있는 장소다. 특히 연희전문 시절의 예술 교육 공간은 그가 펼쳐낸 민족음악운동의 중요한 무대였다.
끝맺으며
채동선은 화려한 조명보다 묵묵한 실천을 택한 예술가였다. 그는 음악이라는 언어로 민족의 아픔을 어루만졌고, 전통과 현대, 서양과 한국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의 삶과 예술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지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그의 음악을 듣고, 그의 고향 벌교를 걷고, 그가 걸었던 길 위에서 조용한 선율에 귀 기울여 보자. 그 선율 속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지켜야 할 아름다움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