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교천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그저 물길 하나로만 보기엔 아까운 하천이다. 이곳은 단순한 자연경관을 넘어, 시대의 흔적과 사람들의 삶, 그리고 정성이 어우러진 살아 있는 공간이다.
벌교천을 따라 걷는 길은 조선시대의 미학이 깃든 ‘홍교(虹橋)’에서 시작된다. 아치형 홍예구조가 아름다운 이 다리는 국가등록문화재로, 벌교의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다음 길목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을 담은 ‘소화다리(부용교)’를 마주하게 되고, 이어 산업화의 기세를 보여주는 ‘벌교철교’와 ‘벌교항’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갈대밭이 출렁이는 중도방죽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길은 단지 걷는 행위를 넘어, 걷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기억하고 자연을 되새기게 한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배경지이기도 한 벌교천은, 그 문학적 배경 속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이기도 하다.
벌교천의 특별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닷물이 조수간만의 차로 들어왔다 나가며 만들어내는 생태적 리듬은 이 길을 걷는 이들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고스란히 전한다. 특히 중도방죽에 다다르면 갈대숲의 바스락거림 속에 어느새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된다.
무엇보다 따뜻한 감동을 주는 요소는, 이 길을 정성껏 가꿔온 사람들의 손길이다. 보성시니어클럽 어르신들이 계절마다 직접 꽃을 심고 가꾼 벌교천변 꽃길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물들인다. 봄이면 화사한 꽃물결, 여름이면 녹음과 바람, 가을이면 갈대와 억새, 겨울이면 그리움마저 피어나는 풍경이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평온을 전한다.
벌교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다. 보성의 역사와 문화, 생태와 정서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자, 마을의 자부심이고 세대를 잇는 산책길이다.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고, 가꾸고, 느끼는 이 공간은 앞으로도 살아 있는 기억의 장소이자 공존의 상징으로 오래도록 사랑받게 될 것이다.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과거를 밟고, 자연을 느끼며, 사람들의 온기를 마주하며. 벌교천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