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우천리 삼층석탑(보물 제943호). 백제인의 망명 서사와 임진왜란 의병·수군 재건의 역사가 겹쳐진 이곳에서, 돌탑은 오늘도 시간을 건너 말을 건다. 사진=문희옥
정형남 소설집 『진경산수』(2015).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을 모티프로 한 단편 〈삼층탑〉은 떠난 백제인과 남은 사람들의 기억을 잇는 서사를 담고 있다. 사진=문희옥
‘조선수군재건로’ 보성 구간 지도. 삼층석탑 인근 고내마을의 조양창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량을 확보하며 수군을 다시 일으킨 역사 현장이다. 사진=문희옥
  1. 삼층석탑의 가치는?

— 보물 제943호, 현장에서 읽는 통일신라 석탑의 언어

보성 조성면 우천리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보여 주는 보물이다. 현장에서 눈여겨볼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삼층 탑신이다. 통일신라 석탑은 대체로 삼층을 기본으로 하며, 이는 과거·현재·미래 혹은 천·지·인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구조로 이해된다.

둘째, 기단의 단순화이다. 이 탑은 단층 기단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던 신라 말기의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대신 1층 몸돌을 유난히 높게 두어 전체적인 상승감을 보완했다.

셋째, 절제된 조형미이다. 몸돌과 지붕돌을 한 돌로 다듬은 간결한 구성, 네 단으로 처리된 옥개석 받침,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상륜부(노반·복발)는 안정과 균형의 미감을 전한다.

전문가들은 이 석탑을 “신라 중흥기 석탑의 품격을 간직한 사례”로 평가하며, 특히 호남 지역에서는 드문 신라 말기 단층 기단 삼층석탑이라는 점을 높이 산다. 1970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친 해체·복원 이후, 1988년 보물로 지정된 점 역시 그 가치를 뒷받침한다.

  1. 정형남 소설 속의 삼층석탑 이야기는?

— 백제인이 바다로 떠난 자리, 남은 사람들의 기도

정형남의 소설집 『진경산수』(2015) 제3편 〈삼층석탑〉에서 이 석탑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기억을 매개하는 상징적 존재로 등장한다. 작가는 산책 중 석탑 앞에서 치성을 드리는 한 여인을 보고, 그 너머로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던 사람들과 끝내 바다를 건너지 못한 채 남아 기도를 올리던 이들의 환영을 떠올린다.

이곳이 과거 바닷가 포구였으며, 떠나는 이들의 무사안일을 빌기 위해 사당과 절, 그리고 삼층석탑이 세워졌다는 설정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엿에 담긴 사연—배 멀미를 달래고 고국의 맛을 오래 간직하라는 마음—은 ‘백제의 한’을 감각적으로 전한다.

이 작품에서 삼층석탑은 단순한 돌조형물이 아니라,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시간을 잇는 기억의 기둥이다. 소설을 읽고 다시 탑 앞에 서면, 같은 풍경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1. 주변 역사 현장은?

— 수군 재건과 의병 항전, 나라를 지키려는 길 위에서

삼층석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조양창이 있다. 정유재란(1597) 당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조양창 도착과 숙박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 이후, 수군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군량 확보의 첫걸음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길은 ‘이순신의 수군 재건로’로 불린다.

조금 더 보성읍 쪽으로 가면 죽전벌과 안치재가 이어진다. 1598년, 죽전벌에서는 전방삭 의병장이, 안치재에서는 최대성 의병장이 순절했다. 인근의 충절사는 이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항전을 오늘에 전해 주는 공간이다.

임진왜란의 격랑 속에서도 이 일대는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이 모였던 길목이었다. 수군 재건을 위해 이곳을 지났던 이순신 역시, 이 석탑 앞을 스치며 국난 극복을 기원했을지 모른다는 상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곳의 역사적 지층은 그렇게 서로를 비추며 이어져 왔다.

마무리

백제 멸망의 한에서 임진왜란의 항전에 이르기까지, 이곳과 그 주변은 늘 국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 앞을 지나던 이순신 역시,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다짐을 이 자리에 남기지 않았을까. 이 석탑은 오늘도, 그 오래된 염원을 묵묵히 품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