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곡정사 전경. 전남 보성군 복내면 조천봉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죽곡정사. 회봉 안규용이 후학을 가르치며 전통 학문과 예절을 이어간 근대 향촌 서당으로, 오늘날에도 당시의 강학 공간과 선비문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문희옥
죽곡정사 목판. 죽곡정사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한 목판. 『주문지결』·『동몽수지』·『향례합편』·『이자학칙』 등을 찍어내며 일제강점기에도 전통 학문과 예법을 이어가려 했던 교육 활동의 증거다. 사진=보성군
「선비, 암울한 시대를 읊다」 전시회 전경. 2026년 보성아트홀에서 열린 「선비, 암울한 시대를 읊다」 전시회 모습. 종손 안동화가 이어온 죽곡정사의 정신과 선현들의 글을 오늘의 전시 공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꾸민 자리다. 사진=문희옥
추모제와 작은 예술제를 마친 뒤 기념촬영. 2026년 10월 19일 ‘회봉 안선생 추모제 및 제2회 죽곡정사 작은 예술제’ 참석자들이 죽곡정사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전통 제복을 갖춘 이들과 참석자들이 한자리에 어우러져 회봉 안규용 선생을 기린 이날의 뜻을 나눴다. 사진=문희옥

 

전남 보성군 복내면 진척서봉길 86-53, 조천봉 남쪽 산자락에 죽곡정사(竹谷精舍)가 자리한다. 낮은 돌담과 나무에 둘러싸인 팔작지붕의 정사는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일제강점기에도 학문과 예절, 지역의 항일 기억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죽곡정사는 근대 향촌 서당의 건축과 강학 기능을 간직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1. 안규용은 누구인가?

회봉 안규용(晦峰 安圭容·1873~1959)은 본관이 죽산이고 자는 경삼으로, 은봉 안방준의 10대손이며 연재 송병선에게 학문을 배운 유학자다. 식민지 교육이 확대되던 시기에도 전통 경전과 도학을 가르치며 약 200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여기서 보성 의병장 안규홍(安圭洪·1879~1910)과의 관계가 눈길을 끈다. 최근 죽곡정사 종손 안동화 씨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안규용은 안규홍을 “같은 집안의 동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또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동을 자세히 기록한 『담산실기』가 후대에 남도록 실질적으로 앞장선 사람이 안규용이었다는 것이 안동화 종손의 설명이다. 의병장 안규홍이 총칼을 들고 항일투쟁에 나섰다면, 안규용은 그 의병의 활동과 정신을 글로 기록하고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보성의 항일사가 무장투쟁과 기록·교육이라는 두 길을 통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1. 죽곡정사의 연혁은?

안규용은 1860년경 세워진 가옥을 매입해 고친 뒤 1921년 ‘죽곡정사’라 이름 붙이고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강안·강규·약속을 마련해 학생들의 공부와 생활규범을 세우고 전통 학문과 예절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1934년 왜경이 서당의 인가를 받으라고 압박하자 안규용은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 문수동 골짜기로 들어가 서산초려를 짓고 독서에 전념했다. 안동화 종손은 이때 스승의 뜻을 잊지 않은 제자들이 다시 힘을 모아 배움터를 살려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1935년 죽곡정사가 중건됐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정사의 기본 모습이 갖춰졌다. 죽곡정사의 1935년 중건은 단순한 건물 수리가 아니라, 스승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학문의 맥을 끊지 않으려 했던 ‘배움의 복원’이었다.

  1. 난간에 걸린 5대 선현의 글은?

죽곡정사 난간 기둥에는 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의 시가 각각 걸려 있다. 대청 중앙 기둥에는 유학의 도통과 오륜을 나타내는 주련도 두었다.

조광조의 시에서는 산촌의 평화, 퇴계에게서는 자연과 학문의 즐거움, 율곡에게서는 세상의 영욕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김장생에게서는 말없이도 통하는 우정, 송시열에게서는 후학에게 학문을 이어주는 책임을 읽을 수 있다. 다섯 선현의 글은 결국 마음을 닦고, 배우고, 사람을 믿으며,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라는 죽곡정사의 교육철학을 보여준다.

  1. 죽곡정사 목판은 무엇인가?

죽곡정사에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직접 책을 찍어내던 목판도 남아 있다. 1923년 『주문지결』·『동몽수지』, 1924년 『향례합편』, 1929년 『이자학칙』 등을 판각했으며, 원래 102판 가운데 95판이 전해지고 있다. 이 목판들은 단순한 출판도구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전통 학문과 예법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려 했던 교육의 흔적이다. 이러한 역사·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죽곡정사의 정신은 오늘날 전시와 추모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 25일부터 10월 7일까지 보성아트홀에서 열린 ‘한시 서화전 및 죽곡황금차’ 전시는 선현의 글과 차 문화를 지역민에게 전했다. 이어 10월 19일 죽곡정사에서는 ‘회봉 안선생 추모제 및 제2회 죽곡정사 작은 예술제’가 열렸다. 안규용 선생의 영정을 모신 추모제에 성악과 헌시, 시낭송, 『소학』 강독이 더해져 고택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은 정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며 뜻깊은 만남을 기억했다. 선생의 가르침과 제자들의 정성이 깃든 죽곡정사는 오늘도 사람과 문화를 잇는 ‘기억과 배움의 공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