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읍 행정복지센터와 채동선음악당 광장이 초록빛 숲정원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싱그러운 나무와 녹음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주민들이 자연을 벗 삼아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마련됐다. 사진=문금주
사라진 건물, 남겨진 시간. 일제강점기 벌교읍사무소의 옛 모습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남아 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웃고 울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사진=벌교읍 행정복지센터 총무팀

벌교를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벌교읍사무소’는 단순한 관공서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는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던 곳이었고, 누구에게는 혼인신고를 하러 찾아간 곳이었다. 자녀의 출생을 신고하고, 가족의 이사와 각종 행정 업무를 처리하며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드나들던 공간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수많은 행정 기록이 남지만, 그 기록 뒤에는 늘 사람의 삶과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도 바뀌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벌교읍사무소는 이제 ‘벌교읍 행정복지센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행정 기능 역시 크게 달라졌다. 과거의 민원 업무를 넘어 주민들의 복지와 생활을 살피는 공간으로 역할이 확대됐다. 하지만 이름과 건물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곳에 쌓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벌교는 오래전부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해 왔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보성 동부권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그 중심에는 늘 행정의 공간이 있었다. 읍사무소를 찾아 골목길을 걷던 사람들, 서류 한 장을 손에 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주민들, 장을 보러 읍내에 나왔다가 읍사무소에 들르던 어르신들. 그 길은 단순히 관공서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러 가던 길이었다.

출생과 혼인, 이사와 취업, 가족의 변화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민들의 중요한 삶의 기록이 읍사무소에서 하나둘씩 남겨졌다. 그래서 옛 벌교읍사무소는 주민들에게 관공서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벌교의 옛 읍사무소 주변에는 벌교의 근현대사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공간들이 이어져 있다. 벌교천과 홍교, 오래된 골목과 시장, 그리고 소설 ‘태백산맥’의 문학 공간까지. 이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벌교가 지나온 시간과 사람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읍사무소를 나와 시장으로 향하고, 시장을 지나 벌교천을 건너 홍교를 바라보며 골목길로 들어서면 오래된 집과 가게, 그리고 그곳을 오가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과거 벌교읍사무소와 연결된 공간에는 벌교 출신 근대음악가 채동선 선생을 기억하는 공간도 마련돼 벌교의 문화와 예술을 되새기는 장소로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벌교의 옛길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사람이 걷고, 만나고, 장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길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익숙했던 가게는 사라지고 오래된 건물은 새로운 건물로 바뀌었다. 매일 오가던 골목길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게 됐다.

도시는 발전해야 한다. 낡은 건물은 새롭게 바뀌고 행정서비스는 편리해져야 한다. 주민들에게 더 나은 복지와 생활서비스가 제공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기억이다. ‘벌교읍사무소’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군가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릴 것이다.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들던 날,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던 날, 가족과 함께 읍내에 나왔던 날. 읍사무소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날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옛 읍사무소로 향하던 길은 모습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우리의 고향길로 남아 있다.

시대는 변한다. ‘읍사무소’라는 이름은 ‘행정복지센터’로 바뀌었고, 행정의 역할도 더욱 넓어졌다. 과거 주민등록과 각종 민원 업무를 처리하던 공간에서 이제는 주민들의 복지와 생활을 함께 살피는 가까운 행정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주민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의 벌교읍 행정복지센터는 어제의 벌교읍사무소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건물은 바뀌고 이름은 달라졌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의 풍경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모습이 바뀌고, 하나둘 익숙한 것들이 사라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사진 속에서만 옛 모습을 찾게 된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옛 벌교읍사무소의 모습. 읍내로 장을 보러 나오던 길. 홍교를 건너 친구를 만나던 날. 읍사무소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시간. 그 모든 이야기가 벌교의 역사다.

화려한 문화재만이 역사는 아니다. 한 사람이 기억하는 골목길, 한 세대가 함께 걸었던 길, 수많은 주민들이 오갔던 옛 읍사무소의 풍경 역시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고향의 역사다. 오늘도 ‘벌교읍 행정복지센터’라는 새로운 이름 아래 사람들의 삶은 계속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그 새로운 이름 속에서 옛날의 ‘벌교읍사무소’를 떠올려 본다.

그곳에는 행정기관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젊은 날이 있었고, 부모님의 시간이 있었으며,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고향길의 풍경이 있었다. 기록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사라지기 전에 기억하기 위해서. 잊히기 전에 기록하기 위해서. 오늘도 벌교의 옛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그 길 어딘가에는 아직도 우리의 시간이 남아 있다.